[그림으로 보는 한국경제] '화성능행도'
‘화성능행도’는 정조 대왕이 1795년(정조 19년)에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8일 동안 일정 중 중요한 행사 장면을 8폭 병풍에 그린 그림이다. 이 병풍은 정조의 어명을 받아 왕실용으로 그렸고, 당시 8폭 병풍을 그릴 때는 도화서 화원들이 한 두 폭씩 나눠 그렸다. 미술사학계에서는 당시 화원이던 단원 김홍도가 전체에 대한 감독을 하면서 ‘시흥환어행렬도’는 직접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인물의 표현에서 김홍도 특유의 필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실용 제작 그림에는 화원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정일 뿐이다. ‘시흥환어행렬도’는 8폭 병풍 중, 정조 대왕과 혜경궁 홍씨 행렬이 음력 윤 2월 15일 오전 8시 45분에 화성 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다가 하룻밤 묵을 시흥 행궁(始興行宮) 앞에 도착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보면, 임금님 행차 때는 길을 가던 백성들이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오늘 이 그림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림의 위와 아래에 장사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윗부분 오른쪽에 보면 술을 파는 하얀 천막이 두개가 있다. 아래 오른쪽 부분에도 술파는 천막이 있고, 그 왼쪽에는 천막 없이 뙤약볕 아래서 술파는 아낙의 모습이 세 명이나 보인다. 들판에서 술을 판다고 해서 ‘들병이’라고 불리는 여인들이다. 그리고 ‘들병이’ 아낙 왼쪽에는 나무판을 들고 다니며 장사하는 소년이 두 명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잔술을 팔고, 아이들이 나무판을 들고 다니며 장사하는 모습은 조선 후기의 여러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단원 김홍도의 유명한 풍속화 ‘씨름’에도 나무판을 들고 구경꾼 사이를 오가는 소년이 있고, 개성에서의 잔치하는 모습을 그린 ‘기로세련계도’에는 소나무 숲 아래에서 잔술을 파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태껸 시합을 하는 모습과 구경꾼을 그린 필자 미상의 ‘대쾌도’에서는, 잔술을 파는 남자 ‘들병이’의 모습과 나무판을 들고 다니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 보면 나무판에 있는 물건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여러 음식 연구자들은 나무판에 있는 노란색이 엿이나 과자가 아니라 떡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1000여 곳의 5일 장이 있었다. 따라서 장터를 찾아다니며 잔술을 파는 ‘들병이’와 떡장수들이 많았고, 그들은 장터뿐 아니라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이 행차 때만 장사하기 위해 천막과 떡판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였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장사치’라고 부르며 천시했지만, 태종 12년인 1412년에 설립된 ‘육의전’을 가게를 중심으로 꾸준하게 상업 활동이 이뤄졌다. 조선 후기에는 화폐유통이 활성화 되면서 ‘육의전’ 상인들 중에서 부자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일부 상인은 세도가와 결탁한 ‘매점매석’으로 ‘거상’이 되었다. 이렇게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잘 유지되던 ‘육의전’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인천항의 개항 때문이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도착하는 증기선에서, 값 싸고 질긴 서양 옷감, 튼튼하고 편리한 독일제 바늘, 사용이 간편한 성냥, 등잔용 석유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개화 물품’이 내려졌고, 그 물건들은 막 개통된 기차에 실려 서울로 쏟아져 들어왔다. 상술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서양 상인들은 조선인들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 회사이름을 조선식 이름으로 만들었다. 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는 1883년 인천에 ‘조선 세창양행’이라는 바늘 수입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바늘 봉투 겉면에, 갓 쓴 조선인 두 명을 그린 다음 그 사이에 한문으로 ‘세창’이라고 써넣었다. 당시 유일한 신문인 ‘한성순보’에 광고도 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일본 담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생긴 담뱃갑에 한글로 ‘상등지 천연쵸(좋은 종이에 담겨있는 천연 연초)’라고 쓰고, 담배 이름도 한글과 영어로 '리리이(Lyly)', '수디이(Star), ‘채리이(Cherry)'로 표기했다. 일본어는 옆에다 조그맣게 표기했을 뿐이다. 누가 대장간에서 만든 바늘을 사겠는가. ‘육의전’ 상품들은 경쟁력을 잃었고, 조선 상인들은 하나 둘 종로를 떠났다. ‘육의전’의 몰락은 조선왕조 경제의 몰락이었고, 경제력이 허약해진 조선은 결국 나라를 잃었다. 소설가 이충렬